에도시대(江戶時代)

① 막번체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약소 다이묘오의 하나였지만, 차츰 세력을 키워, 히데요시의 사후 1600년에 세끼가하라(關ヶ原)의 전투에서 토요토미파를 격파하고, 1603년 정이대장군이 되어, 에도(현재의 토오쿄오)에 막부를 설치했다. 이후 약 260년간을 에도시대라고 한다.

에도막부는 전국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은 영지외에도 쿄오토, 오오사카, 나가사끼 등 주요 도시를 막부직할령으로 직접지배했다. 또 토쿠가와씨 일족(親藩大名)이나, 이전부터의 가신(譜代大名)들에게는 에도에 가까운 영지를 나누어 주고, 세끼가하라 전투이후 가신이 된자(外樣大名)들에게는 東北, 四國, 九州등의 외곽지의 영지를 배분했다. 이와같이 막부가 나누어 준 영지를 한(藩)이라 하고, 그 영주를 다이묘오(大名)라 부른다.

막부는 전국의 한을 지배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조직(막번체제)를 구성했다. 장군의 밑에 정무를 분담하는 부교오(奉行)를 설치하고 있다. 또 비상시에는 막부 최고의 직책인 다이로오(大老)를 설치하고 있다. 막부는 다이묘오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칙(武家諸法度)을 제정하고, 만일 그것을 어기면 영지를 바꾼다든지, 몰수하는 무거운 벌을 주었다. 그러나 막부정책의 범위내에서는 다이묘오는 자기 한에서 독자적인 정치를 할 수가 있었다. 막부는 그밖에 조정의 권한을 제한하고, 사원의 행동에도 간섭을 했다.

3대장군 이에미쯔(家光)는, 다이묘오들의 정실을 에도에 거주하게 하고, 다이묘오들은 격년제로 에도와 자기 영지를 왔다갔다하게 하는 참근교대제를 만들었다.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또한 막부는 전국적 규모의 임시공사등도 다이묘오들에게 그 비용을 부담시켰다. 그것은 모두, 다이묘오들에게 경제적으로 고통을 줌으로써 하극상을 방지하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② 신분제도

막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총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지배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농민으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세금(年貢)이 막부의 주된 재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백성들은 죽지 않게끔, 살지도 못하게끔 잘 생각해서 세금을 거두라」고 말하고 있다. 막부와 각번들은 규칙을 정해서 농민의 일상생활을 세세하게 지시하고, 제한했다. 예를 들면, 「쌀은 세금으로 바치는 것이므로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밥에는 보리나 무우 등을 섞어서 먹을 것, 술이나 차를 사마시지 말것, 의복은 마나 면이외에는 입지 않을 것」따위이다. 또 집 5~6호로 5인조를 구성하여, 납세나 방범의 책임을 공동으로 지게 했다.

소수의 무사계급이, 많은 수의 농민이나 쵸오닝(町人=상인이나 기술자층)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막부는 사공농상(무사·농민·직인·상인)이라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최상위 계급인 무사는 무예나 학문을 닦으며 허리에 두 자루의 칼을 차고, 농민이나 쵸오닝 등이 무례를 범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쳐 죽여도 괜찮았다. 농민이나 쵸오닝은 무사들과 달리 성도 없고, 다이묘오 행렬을 만나면 길에 엎드려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이와 같이 상·하를 차별하는 사고방식은 무사사회에서는 주군과 부하의 주종관계를,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막부는 이와 같이 하여 막부체제를 견고하게 다져 봉건사회를 유지했다.

③ 쇄국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해외도항을 허가하고 주인선(=막부의 허가를 받은 무역선) 무역도 허가했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이 필리핀이나 태국, 베트남 등에 일본인 마을을 만들고 생활하고 있었다. 태국에서 활약한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맹렬한 기세로 전파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이에야스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고, 이어 3대 장군 이에미쯔는 일본인의 해외도항금지 및 해외도항자의 귀국을 금지시키고, 이 규칙을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

이 무렵 1637년 큐우슈우의 시마바라(島原)에서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과 기독교금지 등에 반항하여, 16세의 소년 아마쿠사 시로오(天草四郞)를 대장으로 삼아 잇키를 일으켰다. 막부는 4개월 걸려 이 난을 진압하고, 이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예수나 마리아의 그림을 밟게하는 방법(후미에)으로 기독교 신자를 가려내어 처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어서 기독교를 믿는 자들이 없어지지 않고 막부의 탄압과 순교가 계속되었다.

막부는 1639년, 쇄국령을 공포하여 기독교와 관계가 없는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에게만 나가사끼의 데지마(出島)에서의 무역을 허가했다. 이 쇄국정책에 의해서 일본은 서양문명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일본 독자적인 문화나 산업이 발달했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④ 산업의 발달

에도시대가 되어 전란이 없는 평화가 지속되자, 농업은 더욱 더 발달되었다. 농민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을 넓히고, 농구를 개량, 재배작물의 종류를 다양화하기도 했다. 쌀이외에 면, 생산, 채종유 등 각지의 특산물을 상인에게 팔아 부농이 되는 자도 있었다. 견직물, 술, 종이 등의 수공업도 발달했다.

산업의 발달이나 참근교대제의 영향으로 도로교통이 발달하여 전국에 5개의 가도가 생기고, 그 가도에는 역참이 생겨났다. 또 쌀 등의 대량의 물자를 수송할 때는 배가 빈번이 이용되게 되어, 항로도 발달했다.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상업도 융성하게 되었다. 막부나 다이묘오가 거둔 연공미는 오오사카에서 현금과 교환했기 때문에, 오오사카에는 코오노이께, 미쯔이 등과 같은 대상인이 생겨났다.

상업의 발달에 따라 정치의 중심지였던 에도는, 인구 100만에 가까운 대도시가 되고, 오오사카는 상인의 도시, 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천하의 부엌」이라고 말해졌다.

⑤ 쵸오닝 문화

평화로운 세상이 되자, 학문과 예술도 융성하게 되었다. 막부는 중국의 유학, 특히 주자학을 보호하고, 막부에 學問所를 설치하고 무사의 자제들을 배우게 하였다. 주자학은 주군과 부하, 부모와 자식 등의 상하질서를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에, 막부의 정치에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 무사뿐만 아니라, 쵸오닝들도 「읽기, 쓰기, 주산」등의 교육을 중시하게 되었다. 서민의 교육은 처음에 절에서 행해졌으나 나중에는 데라코야(寺子屋)라고 하는 교육기관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고, 승려나 신관, 실직무사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5대장군 쯔나요시(網吉)의 시대, 오오사카·쿄오토에서 쵸오닝들의 새로운 문화(겐로꾸 문화=元祿文化)가 생겨났다. 오오사까의 쵸오닝인 이하라 사이카꾸(井原西鶴)는 겐로꾸시대 서민들의 생활을 『好色一代男』이나 『世間胸算用』등의 소설에서 묘사했다. 그의 소설에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여 돈이 인간생활을 지배하게 된 사회에서, 돈에 운명이 좌우되는 서민들의 모습이나, 당시의 개방적인 향락생활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⑥ 3대개혁

에도시대가 시작되고 100여년이 지난 겐로꾸시대부터, 막부의 재정이 어렵게 되었다. 막부는 질이 나쁜 화폐를 자주 발행했기 때문에, 경제는 큰 혼란을 겪었다. 물가가 오르고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특히 하급무사들은 영주로부터 받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상인으로부터 돈을 빌리거나, 무사의 신분을 파는 자조차 생겨나오게 되었다. 18세기 전반, 8대장군 요시무네(吉宗)는 막부의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했다(亨保의 개혁). 우선 새 논을 개척하여 세수증대를 계획하고, 무사들에게는 사치를 금하고 절약을 명하였다.

경제가 점점 발달하고 화폐가 농촌에서도 사용되게 되자, 농민사이에서 빈부의 차가 커지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는 빈농들도 많아졌다. 또 냉해나 대기근이 발생하여 굶어죽는 자도 많이 나와 농촌의 비참은 극에 달하였다. 18세기 말, 막부는 재차 정치의 개혁을 단행, 무사에게 검약을 명하고, 무사가 상인들로부터 빌린 돈은 갚지 않아도 좋다는 명을 내려 무사의 생활을 도와 주었지만,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實政의 개혁)

막부는 재정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농민의 세금을 점점 더 부과하게 되었다. 생활에 곤란을 느낀 농민은 연공을 경감시켜 줄 것을 번주나 중앙정부에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힘으로써 저항했다(百性一撥). 막부는 이를 엄하게 금지했지만, 1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잇키는 자주 발생했다. 또한 가난한 쵸오닝들도 에도나 오오사카에서 미곡상이나 고리대금업자 등의 대상인을 습격하여 가옥파괴, 방화, 약탈 등을 감행하기도 했다. 1837년 전직 관리였던 오오시오 헤에하찌로오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오오사카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고 만다. 이 반란이 진압된 뒤, 막부는 세 번째의 개혁(天保의 개혁)을 단행하여 무사에게는 검약을 명하고, 대상인들에게는 매점매석을 하는 조합을 금지시키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이것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⑦ 새로운 학문

유학이 여전히 주도적이었지만, 이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국학(國學)이나 양학(洋學)등의 새로운 학문이 생겨나왔다. 국학은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고유의 사상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국학자들은 『万葉集』나 『古事記』등을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했다. 국학자중에서 『古事記傳』이라는 『古事記』의 주석서를 쓴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유명하다. 국학은, 후일 천황의 직접 정치를 부활시킬려고 하는 존황사상이나, 외국세력을 배척하는 양이사상을 키워, 막말에 일어난 존황양이운동의 추진력이 되기도 한다.

서양의 학문이나 지식은, 쇄국동안 막부가 무역을 허락한 네덜란드로부터 전해졌기 때문에, 난학(蘭學)으로서 발달했다. 그중에서 특히 발달한 것이 의학의 연구로, 스기타 겐빠쿠(杉田玄白) 등은 네덜란드의 해부학책을 번역하여 『解體新書』를 출판했다. 또 히라가겐나이(平賀源內)는 새로 배운 학문을 응용하여 일본에서 최초로 발전기를 제작하고, 이노오 타다타까(伊能忠敬)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일본 전국의 실측지도를 제작했다. 양학에 의해, 서양의 사정을 알게됨에 따라 막부의 쇄국정책이나 양이사상에 반대하고, 일본의 개국을 주장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막부를 무너뜨리는 운동과 연결되어 갔다.

⑧ 개국

일본이 쇄국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구미제국은 근대국가로서 조직을 정비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혁명을 수행하고 세계에 진출하여 해외시장을 손에 넣었고, 미국도 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18세기 말, 러시아가 일본과의 통상을 요구했지만, 막부는 쇄국을 고집했다. 그 후 영국, 미국의 선박이 일본근해에 와서 물과 식량의 보급을 요구하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막부는 이를 물리치고, 개국론자들을 처벌했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군함 네척을 이끌고, 우라가(浦賀)에 왔다. 막부랑 에도 주민들은 대포가 있는 군함에 깜짝 놀라, 그것을 흑선이라고 불렀다. 1854년 막부는 미국의 강화 요구를 받아들여, 일미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외국배가 시모다(下田)와 하코다떼(函館) 두 항구를 사용하는 것을 인정했다.

이어 1858년 미국 총영사 해리스가 시모다에 와서, 미국과의 통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조정이나 다이묘오 등과 상담을 했지만 모두 반대했다. 그러자 다이로오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일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5개의 항구를 무역을 위해 사용할 것을 허가하고 있고, 그밖에도 불평등한 내용이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수입품에 대해서, 일본이 자유로이 관세를 결정하는 권리(관세자주권)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외국인이 일본에서 범법을 하더라도 일본의 법률로 재판하지 못한다고 하는 치외법권의 허용이었다. 존황론자나 양이론자들이 이이 나오스케가 조정의 허가없이 조약을 맺은 것을 강력히 비난하자, 이이는 이들 반대파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엄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결국 에도성의 문앞에서 반대파등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櫻田門外의 변:1860)

⑨ 막부말기

개국에 의해 무역이 시작되자, 생사나 차들의 수출이 급증하여, 국내 물자의 부족현상을 보이고, 물가가 앙등하여 경제가 혼란상태에 빠졌다. 그로 인해 하급무사들이나 서민의 생활이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사쯔마(지금의 가고시마현)와 쵸오슈우(야마구찌현)의 하급무사 사이에서, 존황론과 양이론이 결합된 존황양이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막부는 조정과 협력하여 정치를 행할 것, 즉 공무합체를 고려했지만, 존황양이파들은 더욱 자기들의 생각을 다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사쯔마번은 영국의 함대와 싸우고, 쵸오슈우번은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4국 함대와 교전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통하여 사쯔마, 쵸오슈우의 두 번은 외국의 힘을 실감하고, 양이의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두 번의 젊은 무사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 존황도 막운동을 추진했다. 사쯔마번의 사이고오 타까모리, 오오쿠보 도시미찌등은 도사(코오찌현)의 사까모토 류우마의 중재로 쵸오슈우의 키도 타카요시 등과 동맹을 맺고 신정부 수립을 약속했다. 그리고 영국에 접근하여, 서양식 군비를 정비했다. 한편, 막부도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군함이나 무기를 구입, 두 번에 걸쳐 쵸오슈우번을 정벌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이것을 지켜본 사이고오등은, 무력으로 막부를 전복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정치와 경제의 혼란으로 인해 에도와 오오사카에서 대규모의 폭동이 일어나고, 농민봉기도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또, 사회의 불안으로 인해, 구원을 바라는 심리에서 이세신궁에 참배하는 것이 대유행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15대 장군 요시노부(慶喜)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1867년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한다고 선언(大政泰還)하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천황정치가 부활했음을 정식공포했다(왕정복고). 그러나 신정부가 요시노부에게 관위를 주지 않고, 그의 영지를 모두 조정으로 귀속시키기로 결정하자, 막부측의 무사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쿄오토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신정부군은 도바, 후시미에서 승리하고 요시노부를 토벌하기 위해 에도로 향했다. 그 때, 막부측의 카쯔 카이슈우(勝海舟)와 신정부군 쪽의 사이고오가 회담, 막부측은 신정부군에게 자진 에도성을 건네주는 조건으로 토쿠가와 가문을 존속시킬 것을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약 260년간 계속된 에도막부는 끝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