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칸무(桓武)천황은 혼란한 정계의 기풍을 일신하고 율령정치를 쇄신하기 위해서 794년 헤이안쿄오(平安京=오늘날의 교오토)로 옮겼다. 이후 1192년 카마쿠라 막부가 성립되기까지 약 400년간을 헤이안시대라고 부른다.

헤이안 초기의 율령정치 쇄신과정에서 후지와라(藤原)씨가 정치적으로 대두되게 된다. 이들은 정부의 중추부를 장악하고 다른 유력씨족들을 제거하는 한편, 천황의 외척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셋쇼오(攝政), 칸빠쿠(閔白)직을 독점했다. 그 결과 천황을 대신하여 후지와라씨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고 소위 셋칸정치(攝閔政治)를 전개했다. 셋쇼오·칸빠쿠 둘 다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집행하는 직무로서, 천황이 어릴 때는 셋쇼오, 천황이 성인이 되고 나면 간빠쿠가 정무를 담당했다.

후지와라씨들이 이 지위를 독점·세습화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는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독재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셋칸정치(攝閔政治)의 전성기는 10세기말에서부터 11세기 초반에 걸친 후지와라 미찌나가(藤原道長)·요리미찌(賴通)시대였다. 중앙에서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셋칸정치가 확립되어간 반면, 지방에서는 정치나 치안의 기강이 흐려지고, 그러한 와중에 즈료오(受領)로 불리는 지방관리들이 사재를 축적, 경제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정치가 천황중심의 율령정치에서 후지와라씨 중심의 귀족정치로 이행되어감에 따라, 공지공민제가 붕괴되고 토지의 사유화를 의미하는 장원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그런 장원을 가장 많이 소유한 것은 물론 후지와라씨들이었다. 그 장원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은 셋칸정치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9·10세기에는 고대국가의 전환기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그것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앞시대와 마찬가지로 귀족문화이긴 하지만 종래의 唐風文化와는 달리, 당풍문화를 토대로 한 문화의 일본화가 진척되어 國風文化가 꽃을 피우게 된다. 국풍문화는 당풍문화를 일본적으로 소화시켜 생겨난 귀족문화로서, 그 특색은 수도인 쿄오토에 사는 귀족들의 생활을 반영하여 우미·화려하긴 하지만, 시야가 좁고 매우 감각적인 것이었다.

국풍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일본문학이었으며, 그 기초가 된 것은 바로 카나문자의 발명이었다. 카타카나는 한자의 획에서 생겨난 것으로, 주로 승려들 사이에서 발달했으며, 히라가나는 한자의 초서에서 발달한 것으로 처음에는 여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女手라고도 불렸다). 카나는 8세기말경부터 구체화되었지만, 이것에 의해 일본인들의 생활감정을 자유롭게, 또한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궁중에 출사한 교양있는 여자들이 이 카나문자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모노가타리(物語=일종의 소설), 수필 등에서 걸작을 남기고 있고, 또 만요오슈(万葉集)이래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던 와까(和歌)가 복권되어 유행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문학 항목 참조)

헤이안 중기 이후 후지와라씨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계급들이 쿄오토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지방에서는 새로운 계급층인 무사들이 세력을 다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방의 토호나 부농들이 자기의 토지를 지키고, 자기 영지내의 농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해짐에 따라 생겨난 계층이다. 이들 무사들은 유력한 호족을 중심으로 단결하게끔 되어 무사단(武士團)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겐지(源氏)와 헤이지(平氏)였다.

11세기 중엽, 후지와라씨들의 권력이 약해진 틈을 노려, 시라까와(白河)천황은 상황이 되어 원정정치를 펴면서,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 후 12세기 중엽 상황과 천황의 대립이 생기자 겐지는 상황측에서, 헤이지는 천황측에서 싸웠다.(호오겐·헤이지의 난) 무사들은 이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는 정치의 실권을 잡고, 1167년에 태정대신에까지 올라 平氏들의 권력은 극에 달했다. 平氏들의 권력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고시라까와법황(後白河法皇)은 겐지세력과 결탁,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平氏들을 전멸시키고, 源氏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