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마찌시대(室町時代)

1334년, 고다이고천황은, 천황 중심의 정치를 부활시켰다. (建武의 중흥) 그러나 그것은 고대적인 천황과 귀족정치의 이상을 쫓는 것이었고, 무사계급의 요구나 의향을 무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무사들의 불만을 샀다. 그중 가장 유력한 무사였던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반란을 일으켜 쿄오토로 쳐들어 가자, 천황은 요시노(지금의 나라 현)로 도망쳐 버렸다.

1336년, 타카우지는 쿄오토에서 새로운 천황을 옹립하고(북조), 1338년 정이대장군이 되어 쿄오토에서 막부를 개설했다. 이 아시카가막부는 타카우지의 손자인 3대 장군 요시미쯔가 쿄오토의 무로마찌에 화려한 저택을 지어 그곳을 막부로 이용했기 때문에 무로마찌막부라고 하고, 이 시대를 무로마찌시대라고 한다.

한편, 요시노로 도망간 고다이고천황은, 거기에서 조정(남조)을 세웠기 때문에 두 개의 조정이 대립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시대를 특히 남북조시대(1336-1392)라고 부른다.

무로마찌막부는 카마쿠라막부보다도 장군과 무사의 유대가 약했기 때문에, 유력한 슈우고는 자신의 소유지를 확장하고, 군사력을 양성, 그 지역을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슈우고를 슈우고 다이묘오(守護大名)라고 한다.

카마쿠라시대 말기부터 왜구가 한반도와 중국에 걸친 해역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요시미쯔는 그것을 단속하여 중국의 명왕조와 정식 무역을 개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1467년, 8대 장군 요시마사의 때, 장군의 후계문제를 놓고 무사들은 두 파로 나뉘어, 쿄오토를 중심으로 전란이 11년간이나 계속되었다(오오닌의 난). 이 싸움으로 말미암아 장군의 힘이 약화되고, 장원제등이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실력만 있으면, 신분이 아래인 자가 윗사람을 제거하고 지배자가 된다고 하는 하극상의 사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가 100여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를 전국시대라고 하고, 이 시대의 새로운 지배자들을 센고쿠다이묘오(戰國大名)라고 한다.

무로마찌시대에는 농업의 기술이 발달하고, 물레방아가 사용되어 벼농사 뒤에 보리를 심는 이모작도 널리 행해지게끔 되었다. 농민은 각 촌락마다 회합을 열어 농사기술이나 세금(年貢)등에 관해 상담했다. 각 촌락마다의 유대가 강화된 농민들은 서로 단결하여 막부에 세금을 경감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전당포나 양조장등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것을 쯔찌잇키(土一揆)라고 한다. 또 잇키는 종교적인 것도 있었다(一向一揆)

센고쿠다이묘오는 무기 등을 조달하기 위해 상공업자를 자신의 영지에 모아서 보호했기 때문에, 상공업도 발달했다. 상품유통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각지에 시장이 서고, 운송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대상인들도 증가했다. 또 상인이나 기술자들의 동업조합인 자(座)도 전국적으로 결성되고, 각 지방의 특산품도 생산되게끔 되었다.

무로마찌시대는 막부가 쿄오토에 있었기 때문에, 무사다움과 귀족적인 것이 융합되어 새로운 무가문화를 창조했다. 그것은 중국의 원·명조의 문화나 선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간소하면서도 깊이있는 문화였다. 또 중앙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퍼져서 각지에 민중의 문화가 생겨났다.

건축물로는 장군 요시미쯔가 쿄오토의 키타야마(北山)에 지은 은각이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은각은 쇼잉즈꾸리(書院造)라고 하는 선종의 양식으로, 쇼잉즈꾸리의 건물에는, 방 안에 토코노마(床の間)나 치가이다나(違い棚)가 있고, 타타미를 깔고, 방과 방사이에는 후스마나 아카리쇼오지(明障子)로 구분하고 있다. 이 양식은 점차 무사들의 주택에 사용되게 되고, 현재의 일본주택 건축의 원형이 된 것이다. 또 정원은, 무로마찌 초기에는 금각사처럼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것이었으나 차츰 자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카레산스이(枯れ山水)라는 양식으로 바뀌어갔다. 이 양식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류우안지(龍安寺)의 정원이 유명하다. 이것은, 흰 모래를 깐 곳에 바위를 배치한 것으로 선종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말해진다.

회화에서는 송·원나라에 성행한 수묵화가 전해져서 발달하고, 선승인 셋슈우(雪舟)처럼 독자적인 일본적 수묵화양식(산수화)을 창조해낸 화가도 있다.

전통예능방면에서는, 간나미·제아미부자가 그 당시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소박한 연극을 노오가꾸(能樂)로 완성시켰다. 노오가꾸라고 하는 것은, 주역은 가면을 쓰고, 화련한 의상을 입고 요오쿄쿠(謠曲)에 맞추어 춤을 추는 가무극으로, 독특한 상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다. 노오가쿠와 함께 공연하는 쿄오겡(狂言)은, 노오가쿠와는 대조적으로, 가면을 쓰지 않고, 수수한 복장으로 하는 회화극으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천박함을 익살스럽고 사실적으로 연출한다. 이 노오가쿠와 쿄오겡은 이 시대의 연출형식이 그대로 이어져서 공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