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시대(奈良時代)

710년에, 조정은 중국의 당왕조의 수도인 장안(지금의 서안)을 모델로 삼아, 나라에 헤에죠오교오(平城京)라는 도읍을 건설했다. 가로 세로로 넓은 도로를 만들고, 천황의 궁전, 귀족들의 저택, 절 등이 늘어서 있었다. 푸른 기와지붕에 빨간 기둥, 흰 벽의 당나라풍의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는 나라의 도읍지는 마치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것 같다고 노래 불려졌다.

平城京은 약 70년간 수도로서 번창했는데, 이 동안을 나라시대라고한다. 나라시대는 大寶율령에 근거하여 천황에 의한 정치(율령정치)가 행해지고, 도읍지는 번창하고 귀족들은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시장이 생겨나고, 708년에는 화폐도 사용되어졌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노역, 병역때문에 가난에 허덕여야만 했다. 그중에는 토지를 버리고 도망쳐버리는 자도 생겨났다. 그래서 조정은 새로이 초지를 간척하는 자에게는 그 토지를 영원히 소유하게 해 주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자 유력한 귀족이나, 신사나 절, 지방호족 등이 앞을 다투어 대규모적인 간척사업을 하여 자신들의 토지를 확장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생긴 사유지(=장원)는 그 후에도 점점 확장되어가서, 율령정치의 근본인 公地公民제도가 붕괴되어 버린다. 조정의 정치도 부패하여 넓은 토지를 가진 귀족이나 승려들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됐다.

나라시대 중반, 흉작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귀족과 승려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불심이 깊었던 쇼오무 천황(聖武天皇)은 부처의 힘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나라에다 토오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고, 그 안에 본존으로 높이가 16m나 되는 금동대불을 만들었다. 토오다이지 바로 옆에 쇼오소오잉(正倉院)이 있는데, 이것은 쇼오무 천황이 사용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지금도 수많은 보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는 중국이나 인도, 페르샤등으로 부터 수입된 진귀한 공예품도 섞여 있다. 그 유물들이 1200년 뒤인 오늘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쇼오소오잉이 통풍이 잘되고, 습기를 막는 일본풍토에 적합한 목조 건축법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천황의 허가 없이는 절대로 열 수가 없는 창고이기 때문이다.

조정은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십수차례나 견당사를 파견, 당왕조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텐표오 문화(天平文化)라고 불려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정치가 불교에 의한 진호국가를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문화가 고도의 발전을 보이고, 또한 문화전반에 걸쳐 당문화의 영향이 농후하다. 국가에 의한 당문화의 적극적인 섭취를 반영하여, 현란한 문화의 추진자는 귀족계급이었으며, 중앙편중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万葉集』와 같이 각계 각층 사람들의 적나라한 생활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생겨났으며, 천황 가문의 유서 깊음과 그 권력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사편찬이 국가적 사업으로 거행된 것은 당나라에 대한 일본의 국가 의식의 발전이라고도 생각되어진다.

平城京 :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한 것이지만, 규모는 그보다 작은 동서 4.2km 남북 4.7km의 크기였다. 북쪽 중앙에 천황의 궁궐이 있고, 주작대로를 경계로 左京, 右京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동서남북으로 뻗어진 도로에 의해 구획되어지고 남북은 條, 동서는 坊으로 위치를 표시했기 때문에 이런 도시형태를 조방제라고 한다.

견당사 : 630년 제 1회 견당사가 파견된 이래 894년 스가와라노 미찌자네(管原道眞)의 건의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13회 파견되었다. 8세기에는 그 조직도 대규모이었으며, 견당사 이외에도 유학생, 유학승등이 동행하여, 국제적으로도 앞선 당나라의 정치제도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했다. 일본문화의 발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다대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