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쇼오, 쇼오와시대

①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유럽에서 일어났지만,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관계로 독일과 싸우고, 중국에 있는 독일의 군사기지를 점령했다. 또 중국에 대해서 그 토지와 철도의 이용을 요구하여 21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1차 대전이 끝나고, 1919년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전승국으로 출석한 일본은, 다음해 성립된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21년 군비축소를 위한 워싱톤회의에서 미국, 영국, 일본의 해군력이 5:5:3의 비율로 정해지고, 일본이 대전중에 획득했던 중국내에 있는 독일 군사기지도 반환하라고 결정되었기 때문에, 일본 국내의 해군과 우익단체들은 큰 불만을 가졌다.

대전중, 일본은 유럽 여러나라에 팔던 공업제품을 아시아에 수출하여 유례없는 호경기를 맞이했다. 그 결과 막대한 이익을 얻은 대자본가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쌀을 비롯한 생필품의 가격이 급등하여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많아졌다.

1819년 토야마(富山)현에서 어부들의 부인네들이 쌀값을 내리라고 요구하며 쌀가게를 습격한, 소위 쌀소동이 발생했다. 이 소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이 수습된 뒤, 평민재상이라고 불린 하라 케이(原敬)가 일본 최초의 본격적 정당내각을 구성했다.

1923년 9월 1일, 칸토오(關東)지방을 중심으로 대지진이 발생했다. 토오쿄오나 요코하마 등의 각지에서는 지진에 의한 화재로 많은 가옥이 불타고, 사망자는 10만명을 넘었다. 일본에서 최대 규모인 게이힝 공업지대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일본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제1회 총선거는 1890년에 실시되었지만, 그것은 일부의 사람에게만 선거권이 있는 것이었다. 그 뒤 1925년에 25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정부는 이와 동시에, 치안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회운동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關東대지진 뒤, 토오쿄오 등에서는 대규모의 빌딩 등이 계속해서 지어지고 지하철도 생겼다. 또 전화가 널리 보급되고, 자동차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등장했다. 또 라디오방송도 개시되고 신문이나 잡지의 발행부수도 늘어났다. 교육, 문화도 보급되고, 구미의 학문이나 기술도 일본에 정착되어져 갔다.

② 태평양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엄청난 불경기를 맞이했다. 그것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1929년에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어, 일본경제도 그 영향으로 경제적 위기에 당면했다. 농민의 생활은 극도로 궁핍하고, 특히 東北지방에서는 냉해로 비참한 상태에 놓여졌다. 정부와 군부는, 중국대륙에 진출함으로써 이 경제적 난관을 타개할려고 생각했다. 재벌들도 이에 찬성, 전쟁에 의해 경기 회복을 꾀할려고 했다. 1931년, 군부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다음 해 만주국을 새웠다. 그러나 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1933년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또 국내에서는 1932년 해군 청년장교가 수상을 암살하는 사건(5.15사건)이 발생하고, 1936년에는 육군 청년장교들이 대신들을 살해하고 군부내각을 세우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금방 진압되었지만, 사회는 점점 불안한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일본군부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또 1939년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고, 동남아시아에도 출병했다. 1941년 일본군은 하와이의 진주만에 있는 미국 해군기지를 기습공격하고 나서, 미국,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폴, 버어마, 인도네시아 등을 점령했지만, 일본군에게는 그 광대한 지역을 통치할 만한 힘이 없었고, 그러는 동안에 미국도 전력을 회복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많은 남자들이 군대에 소집되고, 대학생의 대부분도 학업을 중단하고 전쟁터로 나갔다. 쌀을 비롯한 모든 생활물자가, 극도의 부족현상을 보여, 배급제가 되었다. 중학생들도 공장에 동원되고, 대도시의 아동들은 농촌으로 소개되었다.

1945년이 되자, 토쿄대공습, 오키나와전투 등 일본군의 패배가 명백해졌다.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연합국은 포츠담회담을 열어,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일본정부가 그것을 받아들일까 말까로 고심하고 있을 동안,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에는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도 8월 8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어쩔 수 없이 일본정부는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라디오 방송으로 전쟁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렇게 해서 1931년에 군부가 시작한 전쟁은 15년 만에 겨우 끝나게 되는 것이다.

③ 전후의 재출발
일본이 항복하자,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미국의 맥아더원수가 와서, 일본을 점령하고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제도는 미군이 직접 통치했다. 맥아더원수는 일본정부를 관리하고, 명령하여 군국주의를 제거하고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제도를 하나씩 개혁해 나갔다.

먼저, 극동군사재판소가 설치되어, 전쟁동안의 정부와 군 수뇌자는 전쟁범죄자로서 재판을 받았다. 또 정치의 민주화로는 치안유지법이 폐지되고, 20세 이상의 남녀 모두에게 선거권이 주어져 부인의 참정권이 실현되었다.

경제면에서는, 군부와 협력하여 전쟁을 추진했던 미쯔이, 미쯔비시, 스미토모 등의 재벌을 해체하고, 독점금지법을 만들어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자작농이 많아지도록 했다. 그 결과 지주와 소작농이라는 봉건적 관계가 소멸되고, 자작농의 노력으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교육면에서는, 교육기본법을 만들고, 학교제도는 6:3:3:4제로 하고, 의무교육을 지금까지의 6년에서 9년으로 늘리고 남녀공학으로 전환시켰다.

1946년에는, 나라와 정치의 기본이 되는 새로운 헌법인 일본국헌법이 공포되고, 다음해 5월 3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1)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주권재민(主權在民), (2) 전쟁을 포기한다고 하는 평화주의(平和主義), (3)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인권존중(人權尊重)의 세가지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또한 천황을 국가의 상징으로 규정했다. 특히, 제9조의 전쟁포기 항목에서는, 국제분쟁 해결을 위하여 무력을 쓰지 않을 것을 정하고 있다. 이외에, 노동자의 단결권이나 스트라이크권을 인정하고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을 영위할 권리(生存權)도 규정하고 있다.

전후의 일본은, 국토는 황폐해지고 산업도 쇠퇴하여 국민생활도 최악의 상태였다. 도시에서는 식량이 부족하고, 인플레현상으로 물가는 계속 올라갔다. 또 해외로부터 수많은 귀국자들이 몰려와서 실업자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전후의 혼란속에서도 사람들의 생활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졌다.

정신면에 있어서도, 사상, 언론, 신앙이 자유롭게 되고,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 문화활동이 왕성해졌다. 그리고, 개인의 해방과 민주화를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보급되었다. 1949년, 유까와 히데끼가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여 많은 일본인들에게 기쁨과 자심감을 안겨 주었다.